며칠 전 정연주의 KBS 사장 시절 배임혐의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이 무죄로 확정되었다. KBS 사장 임기가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그를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던 쪽의 주요 인물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정연주에 대한 재판이 무죄로 확정될 경우 책임지겠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최종 판결이 난 지금, 그는 책임지겠다는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사 표명을 했다. 반면 무죄 확정 선고를 받은 정연주에게 축하한다는 말도 건냈다고 한다. 반신 불수가 되도록 또는 식물인간이 되도록 때려놓고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뒤로 젖혀 놓고, 이제 겨우 마비가 풀려서 일어선 사람, 식물인간에서 의식이 돌아온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이 전부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정 잡배나 조폭도 이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진 않나?

아무튼 정연주는 KBS 사장 자리에서 해임되던 그때의 사건들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기록해 놓고 그 때의 경위를 <정연주의 증언 – 나는 왜 KBS에서 해임되었나>라는 책을 통해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고 한다. 당시 얼마나 보수 언론과 방송이 한 몸이 되어 그를 해임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는지, 나도 당시 사건의 경황을 흘려 들으며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에 한겨레 논설위원 하다가 KBS 사장 임명되어 일하던 정연주라는 인물이 경영이 무척 서툴렀던 데다가 괜한 아집도 있는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후 시간이 흘러 약간의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당시의 내가 정연주라는 한 사람을 그렇게 무심결에 평가했다는 점에 대해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공영방송의 사장자리에까지 올라간 인물에게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지만 아무튼 그의 부당한 해임 건에 대한 ‘투쟁’의 기록을 읽으려는 찰나, 지난 여름에 <정연주의 기록 –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라는 책이 먼저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왕이면 KBS 사장이 되기 전, 동아 일보 강제 해직 기자 신분이었던 정연주라는 인물이 그 암흑의 시기를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먼저 아는 게 좋겠다 싶어 이 책을 먼저 골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정연주가 동아일보 신입기자로 입사한 이후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 재임 및 퇴임시절까지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을 왔다 갔다 하며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인생의 큰 사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동아일보 해직 전후의 상황을 필두로 유신 정권과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민주화 관련한 그의 활동들이 주욱 나열된다. 교도소에서 생활하며 박정희 서거 소식을 듣고 기뻐했으나 여전히 민주화는 요원한 5공 시대에 절망하고, 또 그를 엮어 용공사건을 조작하려던 권력의 눈을 피해 은신 생활을 계속 해야만 했던 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와중에 여러 민주화를 위한 활동도 하고, 잡히기도 하고, 쫓겨 다니기도 하며 온갖 고생을 했던 내용이 서술된다. 특히 그런 도피생활 중에 미국에 있는 형님 댁으로 이민을 떠나시게 된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 드리지 못하고 아버지는 동네 목욕탕에서 몰래, 그리고 어머니는 손녀를 기다리며 서 계신 모습을 지나가는 버스에서 몰래 보고 지나갈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는 부모님 이야기라서 그런지 무척 안타깝게 여겨졌다. 그렇게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이민 가신 부모님의 임종과 장례식도 함께 할 수 없었던 이후의 상황까지 하면 안타까움은 더해지는 것 같다.

아무튼 그런 그가 5공이 몰락하고,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면서 다시 기자 생활을 하게 되는 부분은 그래도 신나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수십 년간 피해 다니던 그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된 기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무척 신나는 일일 터이다. 물론 북핵 관련 취재를 하고, 국내 기자 신분으로는 처음인 단독 방북 취재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은 그리 신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KBS 사장으로 임명된 그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임기 중에 절대 전화하지 않을 두 사람이 검찰총장과 KBS 사장이라는 말을 건네며 눈치보지 말고 소신을 갖고 경영하라며 힘을 실어주었고 노무현은 약속대로 임기 중에 그에게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해진 일화다. 그 내용이 이 책에도 실려있다. 책의 마지막 장은 그가 KBS 사장으로 임명되는 정후의 상황과, 사장 선임 후 그가 주도했던 일들이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KBS 사장이 되기 전에도 거의 인연이 없었고, KBS 사장이 된 이후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노무현 대통령이 지켰기에 역시 노무현 대통령과 엮이는 내용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황망하게 떠난 노무현 대통령과의 더 깊은 인연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이 그의 글에서 많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회고록이라는 게 사실 깊이 있는 이론을 늘어놓는 자리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겪어온 삶에 대한 기록에 가깝기 때문에 회고록 자체의 무게는 사실 상대적으로 가볍기 마련이다. 결국 회고록의 무게를 결정 짓는 것은 그 사람의 성찰이나, 철학의 깊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 전체로 겪어온 삶의 무게와 동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한 <정연주의 기록>은 그런 평이한 구조임에도 그가 살아 이겨낸 삶의 기록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질 수 밖에 없는 묵직한 무게를 보여 주고 있다. 속도감 있게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지만 남은 여운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책이다. 그냥 지나쳐 갈 뻔 했는데 읽기 참 잘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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