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높은 뜻 교회의 김동호 목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는 꼼수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글을 혹시라도 읽는 사람이라면 이미 잘 아는 이야기일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혹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김동호 목사의 페이스북에 방문하여 공개로 설정되어 있는 글을 읽어볼 수 있다. 김동호 목사의 ‘나는 꼼수다’에 대한 생각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이후에 이와 연관되어 이어지는 김동호 목사의 생각과 그에 대한 댓글이 이어지고 있어 자세한 상황은 직접 그곳에 가서 확인하는 것이 나을 것 같고, 여기에는 발단이 된 김동호 목사의 ‘나는 꼼수다’에 대한 글 하나만 아래에 붙여 넣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김동호 목사 발언 보기"
김동호 목사는 위의 글에서 ‘나는 꼼수다’를 들어보았고, 나꼼수가 위험을 무릎 쓰고 거짓을 파헤쳐 밝히려 하는 진실에 대해 대부분 동의한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나꼼수에 대한 첫 견해는 나꼼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 사뭇 대조적이다. 나꼼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로는 나꼼수의 빈정거림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김동호 목사는 말하고 있다. 옳지 않은 것에 옳지 않다 말하는 것 그 이상으로 나가는 것은 모두 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마태복음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비록 거짓에 대항해 진실을 밝히려 하는 나꼼수라 하여도 빈정거림을 일삼는 나꼼수는 결국 나쁘고 악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나꼼수가 결국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유치원 도덕 선생이라면 김동호 목사처럼 말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시시비리를 가리는 것보다는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건네는 법을 가르치는 게 교육에 있어 우선이다는 말도 유치원 선생의 입에서는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적 능력이 아직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저지른 사소한 잘못에 시비 걸고 싸움을 하기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토닥여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성 발달의 첫걸음일 수 있다. 그렇게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 형성을 배운 이후에 사람에 대한 따듯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잘못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김동호 목사는 빈정거림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무엇의 가치를 따지는 데 있어 기본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따질지는 모르겠지만 최종 판단은 격식을 차리느냐 빈정거리느냐에 따라 내리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의견에 무게를 싣기 위해 김동호 목사는 마태복음의 ‘오직 너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는 구절도 인용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 김동호 목사의 생각에 힘을 실어줄 구절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구절뿐만 아니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류의 각종 유사한 구절을 성경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동호 목사가 빈정거림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김동호 목사는 나꼼수를 싫어하는 것에 앞서 성경부터 싫어하고 볼 일이다. 기독교부터 싫어하고 볼 일이다. 하나님부터 욕하고 볼 일이다. 김동호 목사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지만 단순한 몇 구절이 아닌 성경 속 수많은 사건 속 내러티브에 전반에 흐르고 있는 빈정거림에 비하면 김동호 목사가 인용한 것과 같은 구절은 오히려 성경에서 마이너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그 수많은 빈정거림을 다 여기에 나열할 수도 없다. 나꼼수의 마지막 맺음말이 ‘이 나쁜 새끼들아’라는 말이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김동호 목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례를 받고자 다가오는 무리에게 다짜고짜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설을 퍼부은 것과,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근거로 안식일에 이삭을 베어먹은 예수의 제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무리들에게 예수 또한 ‘독사의 자식들’이라 욕설을 퍼부은 것을 말이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보다 현실감 있게 번역하면 ‘이 개새끼들아’라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이다.
그것뿐인가 예수가 무리들과 모여 있을 때 당시의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들을 비꼬고 비아냥대는 농담을 하며 함께 낄낄대는 장면은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병을 고쳐달라고, 자식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먼저 건네지 않고 다짜고짜 비아냥대며 신경을 긁는 예수의 모습은 어떤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일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조용히 타이르면 될 것을 예수는 그들의 상을 뒤엎고 채찍질까지 하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김동호 목사의 판단 기준에 따르면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한들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악한 행위고, 신앙을 병들게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예수는 그렇게 당시의 정치 권력, 종교 권력을 비웃고 비아냥대고 빈정거리다가 속된 말로 싸가지 없다 찍혀 최후를 맞이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복음서만 그런가. 구약 성경을 보아도 별반 차이가 없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 보면 먼저 총리가 된 요셉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자신의 형제들을 갖고 장난치는 것에서도 빈정거림이 찾을 수 있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져 뒤에 가서 울었다 한들 요셉은 형제들을 갖고 놀며 비아냥거렸다. 모세는 또 어땠나,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하나씩 불러오며 권력자를 조롱하고 약을 올렸다. 재앙을 불러올 능력이 있는 자라면 한번에 깔끔하게 끝내야지 그런 식으로 살살 약 올리면서 장난치는 건 자신의 능력을 과용하는 비아냥일 뿐이다.‘ 바알과 아세라 신의 선지자와 대결을 벌인 엘리야 또한 제단에 불이 내려오지 않아 황망해하는 상대를 향해 맘껏 빈정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백성들의 노래를 비아냥이라 여기고 시기했던 사울의 경우 또한 보라. 이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은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여 비아냥댄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비아냥에 마음 상해하던 사울이었다. 시편을 가보자. 나꼼수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자신이 당한 억울함, 거짓 세력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내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에 대한 복수를 넘어 상대의 자식까지 저주하는 내용도 찾을 수 있다. 원수에 대한 복수를 넘어 자식까지 저주하는 것은 악랄하기까지 하다. 김동호 목사의 판단 기준에 따르면 정말 이러면 안 된다. 여기에 비하면 나꼼수의 ‘이 나쁜 새끼들아’는 약해도 너무 약하다. 또한 고통에 처한 욥이 자신의 삶 자체를 놓고 빈정대는 탄식을 들어보라.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욥의 친구들과 욥 중에서 하나님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내가 아는 성경은 결코 ‘우리 싸우지 말고, 욕하지 말고 착하게 지내요’라는 착한 아이 신드롬에 취한 말을 던져 놓는 책이 아니다. 물론 김동호 목사가 언급한 것과 같은 구절도 있긴 하지만 성경은 많은 곳에서 시비 걸고, 도발하고, 상식적 차원에서의 예의나 격식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성경의 수많은 내러티브 속에서, ‘개새끼들아’라고 욕하고, 성전에서 상을 뒤엎고 채찍질을 하며 난동 부리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비아냥댐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진리의 조각들을 발견하여 해석하고 전달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목회자의 입에서 ‘나는 빈정거리는 게 제일 싫다’는 말,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그런 식의 표현이라면 악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상식적인 보수, 합리적인 보수의 이상적인 모습을 꾸준히 보여왔던 김동호 목사이기에 그의 이런 반응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김동호 목사가 그 동안 했던 여러 발언들과 그가 했던 여러 좋은 시도들을 통해 충분히 보아 왔던 그의 한계가 이번에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났을 뿐이라 생각된다. 차라리 그가 나꼼수가 다루는 내용 자체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나꼼수에 대한 거부반응이 좀 더 자연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부정과 불의에 대항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는 동의하면서도 빈정거림 때문에 거부한다는 그의 모습은 공의보다 격식과 예의를 우선시하는, 소위 지적으로 미성숙한 유아기 시절에나 맞을만한 착한 아이 신드롬의 모습밖에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모습 속에서 비꼼과 비아냥에 시비 걸기 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공의에 더 무게를 두고 성경과의 묘한 충돌이 느껴지니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 뿐이다.
모든걸 차치하고 나서라도 부패한 권력에 대한 약자의 빈정거림과 비꼼이 과연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될만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조차도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부패와 부정은 뒤로 숨기고 엄숙주의로 일관하는 권력에 대항한 비아냥과 비꼼은 부패와 부정을 드러내는 좋은 수단일뿐더러 그러한 부패와 부정을 숨겨 무덤에 회칠하는 식의 엄숙주의에 대한 통쾌한 역공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구도를 조망하지 못하고 단순히 빈정거림과 비꼼이라는 행위에 몰두하여 모든 비판을 그곳에 집중하는 것은 공정한 판단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적 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김동호 목사는 또한 이러한 빈정거림으로 일관하는 나꼼수가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일견 맞는 듯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진단을 뒷받침할만한 어떤 역사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어느 특정 사회가 병들어 결국 쇠망하는 데에까지 이른 수많은 역사적 사료에서 나는 그 원인이 권력에 대해, 불의에 대한 빈정과 비꼼에서 비롯됐다는 예시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권력이 부패하고 종교가 부패하며 쇠락의 길을 걸어간 많은 역사적 사례는 보았지만 권력에 대한 빈정과 비꼼으로 병들어간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김동호 목사의 이런 시각은 언뜻 그럴 듯 하지만 사실상 세균에 감염될까 초조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손을 박박 닦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위생 완벽주의자의 초조함에 다름 아니라 생각한다. 유해한 세균이 피부에 전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몸의 면역체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세균에는 병들지 않을 정도로 대비되어 있다. 빈정과 비꼼이 정말 사회를 병들게 할만한 세균과 같은 존재라 여긴다 하더라도, 사회의 면역체계는 나꼼수 정도의 비아냥에 병들 정도로 허약하지 않다. 오히려 사회의 면역체계를 더 강화시켜 권력의 탐욕과 불의를 좀 더 잘 막아낼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낼 확률이 더 높다. 나꼼수가 사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는 김동호 목사의 생각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적는 동안 스쳐가며 들러본 김동호 목사의 페이스 북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에 눈에 띄었던 두 개의 댓글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첫 번째 댓글은 나꼼수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맘껏 하는데 왜 나꼼수에 대한 비판은 해선 안 되는 것처럼 구는지가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댓글이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나꼼수 또한 지금에도 비판거리가 많고, 또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한다. BBK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 가카의 꼼수와 거짓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서 약간 빗겨나 신변잡기적인 가십을 이야기하며 낄낄대는 것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할 만하고, 나꼼수 제작자들도 반성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다만 나꼼수가 지적하는 불의에 대해서도 분노하지도 않고, 또 비판 받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지 못한 채, 단순히 욕설이 나오고 비꼼이 나오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도 못할뿐더러 비판의 축에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가장 저급의 유치한 수준이 비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나꼼수는 비판하면 안되는거냐며 발끈하기 전에 자신의 비판의 수준을 다시 점검해 보길 바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꼼수 비판한다고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유치한 수준의 비판에 대한 비판임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댓글은 김동호 목사가 나꼼수에 대한 위의 글 이후에 적은 외국 선교사의 어려운 재정 상황을 돕자는 글에 달린 한 목회자 준비생의 댓글이었다. 김동호 목사의 나꼼수 글에 달린 댓글 수와 외국 선교사를 재정으로 후원하자는 글에 달린 댓글 수를 비교하면서 나꼼수에는 수백 개의 글이 달리고 외국 선교사의 재정 후원에 대한 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댓글 수를 보며 이를 보며 지금 세대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댓글이었다.
이 두 번째 댓글을 보며 오히려 나는 목회자를 준비하는 자의 사회를 바라보는 수준의 저급함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꼼수의 글에 달린 댓글과 선교사 후원의 글에 달린 댓글을 비교하며 두 댓글이 마치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그 흑백 논리의 단순함이 어떤 면에선 측은하고 또 어떤 면에선 섬뜩하기도 했다. 논쟁이 붙을만한 글에 달리는 댓글의 수와 논쟁의 여지가 적은 글에 달린 댓글 수를 비교하여 얻을 수 있는 지금 세대에 대한 인사이트가 과연 있기는 한가. 두 글에 달린 댓글이 서로 양립 불가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대립의 관계로 설정하고 비교하는 단순함도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분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가능성도 많을 것 같다. 그 분들에게는 이렇게 장문의 글로 김동호 목사의 나꼼수 발언에 대해 비판하는 나 같은 사람은 선교사 후원 같은 것에는 침묵하면서 비판거리만 생기면 달려들어 비판을 퍼붓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논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단순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단순한 세계관으로 보는 명약관화해 보이는 세상에서의 단순한 삶이 행복할지는 몰라도 세상을 똑바로 보게 하지는 않는다. 김동호 목사를 이렇게 장문의 글로 비판하는 내가 그런 분들에게는 소위 말하는 김동호 안티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김동호 목사가 열심히 이끄는 탈북자 자립 사업에 한번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을 헌금으로 낸 적도 있고, 한국 교회를 다시 살리겠다는 일념에 김동호 목사가 세우고 이끌어온 ‘바른 교회 아카데미’에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기 후원을 하며 김동호 목사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김동호 목사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꼼수 발언에는 가차 없이 비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부디 김동호 목사의 나꼼수 발언에 비판이 넘쳐난다고 하여 그 단순한 세계관으로 이 세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p.s. 오랫동안 기독교 관련 글은 거의 올리지 않고 지내왔는데, 이번 김동호 목사의 나꼼수 발언 관련해서는 없는 시간 쪼개서라도 이렇게 블로그에라도 풀어놓지 않으면 속병이 걸릴 것 같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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