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들러 Mars technico 780 C 라는 제품이다. 2mm 연필심을 끼워 사용할 수 있는 전문 제도용 용품이지만 연필 대용으로 아무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다. 대학원 시절에는 그래도 나름 즐겨 사용했는데, 점점 연필을 사용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서 서랍 속에 줄곧 박혀 있었던 녀석이다. 두꺼운 연필심의 느낌 그대로 쓸 수 있고, 심 또한 편하게 깎을 수 있고, 심이 부러지지 않게 넣어 휴대할 수도 있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맘에 쏙 드는 녀석이었다. 연필은 물론이고 만년필도 그다지 쓸 일이 없는 환경이 제일 큰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번에 새롭게 시작한 일은 종종 손으로 뭔가를 그려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무슨 대단한 그림을 그리거나 정교한 제도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을 만들 때 표현하고자 하는 도표를 손으로 직접 그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럴 때는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할 수 있는 연필이 무엇보다도 제격이기에 이 녀석을 사용 하는 게 딱이다.
전에 쓰던 것은 미국에 놓고 와서 새로 사야 했는데, 이왕이면 일반형이라 할 수 있는 위의 780 C 모델보다 좀 더 고급형 홀더를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리나케 교보문고로 달려가 아래와 같은 모델명 925-25-20 홀더를 구입했다. 대략 가격은 780 C의 두 배 가격이다.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일단 몸체가 플라스틱이 아닌 금속이라 첫 눈에 고급스러운 느낌이 난다. 게다가 780 C의 경우는 홀더 머리를 누르면 심이 자유 자재로 움직여 심의 길이 조정을 수동으로 해야 하는 반면 925-25-20 홀더의 경우 샤프의 장점을 적용해 머리를 누를 때마다 심이 조금씩 돌출되도록 되어 있다. 어느 모로 보나 780 C 홀더의 두 배 가격이 그리 아깝지 않은 제품이다. 그래서 주저 없이 925-25-20 제품을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홀더뿐만 아니라 위의 그림과 같이 심을 깎는데 사용하는 스테들러 502 심연기도 같이 구매를 했다. 그림에서 위로 뽈록 튀어난 구멍이 홀더를 넣는 구멍인데 여기에 홀더를 넣고 빙글빙글 돌리면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연필심이 깎인다. 심연기 내부를 보면 연필심을 칼날이 깎지 않고 원통형의 표면이 톱니처럼 거칠게 되어있어 심연기를 돌리면 연필심이 이 거친 면을 따라 갈리게 되어있다. 칼날로 깎는 것이 아니라 거친 면으로 가는 형식이라 연필심이 아주 부드럽게 갈리고, 아주 뾰족한 정도까지 미세하게 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연필심을 갈 때의 그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갈리는 느낌이 좋아서라도 계속 사용하고픈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이 심연기가 주는 매력이 아주 크다 생각된다. 심연기 앞의 작은 구멍 두 개는 원하는 심의 굵기 정도에 따라 연필심의 길이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흰 부분은 다 깎고 난 후에 연필심에 남아있는 흑연 가루를 닦아내는 용도로 사용한다.
아무튼 그렇게 집에 와서 반가운 마음에 연필심을 갈고 난 후 몇 자 끄적여보려고 하는 차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새로 산 홀더가 심연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925-25-20 홀더가 780 C 보다 약간 더 굵다. 아마도 925-25-20용 심연기는 구멍이 좀 더 넓은 것으로 따로 있을 터인데 따로 확인하지 않고 무심결에 동일한 심연기를 사용할 거라 생각하고 산 내 실수라 생각했다. 다음번에 들러 다른 종류의 심연기로 교환하면 될 문제라 생각했다. 며칠 후 다시 들른 교보문고에서 직원은 역시 나의 예상대로 925-25-20용 심연기가 따로 있다는 말을 건냈다.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내게 직원이 내민 심연기에 나는 순간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직원이 나에게 보여준 심연기는 바로 아래처럼 생긴 심연기였다.
아니 이게 뭐란 말인가. 몇백원짜리 조잡한 연필깎이처럼 생긴 것을 건네는 것에 믿기지 않았고, 몇 번이나 직원에게 확인을 다시 했지만 925-25-20용 심연기는 위와 같이 생긴 조잡한 것이 유일하다는 것을 누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고급형 홀더를 사용하려면 일반형 홀더에 사용되는 심연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한 심연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재차 확인했지만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고급형 홀더를 사용하고 싶다고는 하지만 이를 사용하기 위해 조잡하게 보이는 심연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결국 심연기를 교환하지 않고 대신 홀더를 925-25-20에서 예전에 쓰던 780 C 홀더로 교환해서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납득이 잘 되지 않아 집에 돌아온 후 스테들러 관련 웹 페이지 여러 곳을 검색해 본 결과 직원의 착각이 아닌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다 고가의 홀더에 저품질의 심연기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홀더의 굵기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심연기의 홀더가 들어가는 구멍 크기를 약간 조절한 약간 다른 버전의 제품을 내놓는 것으로 쉽게 해결될 일일 것 같은데 왜 굳이 고가의 홀더에 저런 질 낮게 보이는 심연기를 매칭시켜 놓았을까? 마치 배기량도 더 크고, 다양한 기능이 추가된 고가의 차량이 저가 모델에도 기본으로 장착된 에어컨이 빠진 상태로 판매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기괴한 상황이라 느껴진다. 이래서야 누가 고급형 홀더를 사고 싶다 하더라도 맘 편히 살 수가 있겠는가.
어찌되었든 부디 이 작은 문제가 수정되어 925-25-20 홀더에 사용할 수 있는, 502 심연기와 같은 고급형 심연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분 좋게 고급형 홀더랑 심연기 하나씩 기쁜 마음으로 구매할 의사가 있는데 말이다...
'Impressions > Trag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이러니한 스테들러 홀더와 심연기의 조합 (8) | 2011/09/13 |
|---|---|
| 추잡하군 (0) | 2009/11/28 |
| 영결식 한 장면 (9) | 2009/05/29 |
| 조선일보의 속마음 (12) | 2009/05/29 |
| Pilgrimage (4) | 2009/05/25 |
| 봉하마을 (2) | 2009/05/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