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6.25 전쟁이라는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은 잠시 살짝 비껴놓고, 대신 수십년동안 지속되어 온 분단의 현실에 대해 ‘왜 우리는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6.25 전쟁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구이고 적이 누구인지 뚜렷하게 아는 것도 중요할 터이지만 영화는 그런 주제는 지난 50여 년의 분단 역사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었다는 듯, 이제는 왜 우리가 여전히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물론 6.25 전쟁 자체에 대해 이 영화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는 침묵을 통한 암묵적 동의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즉, 6.25 전쟁 발발의 책임은 북쪽에 있고, 북의 적화통일 전선에 맞서 싸운 우리의 싸움은 숭고하다는 당시의 주류 평가를 인정하고 있다 봐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분단을 끝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휴전 상태인 전쟁을 다시 시작해 어느 한 쪽의 승리로 통일이 될 수도 있을 터이고, 어느 한 쪽의 체제가 자연스레 붕괴되며 흡수 통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양 측이 민족의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에 공감하여 섣부르지 않고 침착하게 평화로운 분단의 종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공동경비구역 JSA>는 6.25라는 분단의 원인에 대해서도, 분단을 종식시킬 통일의 방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대신 갈라져 살아야 하는 분단의 현실을 바꿔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라 강력하게 호소하는 쪽을 택했다. 피범벅인 전쟁을 치른 지 50여 년이 지나고 나니, 여전히 많은 상흔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시시비비보다는 다시 같이 사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흐른 2004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야기의 시점을 6.25 전쟁 한 복판으로 이끈다. 영화는 전쟁은 참혹하기 그지 없는 것임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며 이러한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또한 전쟁이 일어난 그곳에 나와 적의 구분이 뚜렷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전쟁에서 북측은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상대이다. 어쨌든 전쟁은 전쟁이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태극기 휘날리며>는 분명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반전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며 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영화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질문을 형제가 서로 다른 편에 서서 싸우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형제가 다른 편에 속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아이러니를 통해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영화 속의 가족주의를 벗겨내면 사실상 남는 건 반공주의인 다소 의아한 반전 영화가 되는 것이다. 형제애의 아이러니를 벗겨낸 그곳에는 여전히 지켜야 할 조국을 위해 싸우는 숭고한 이들과, 무력 도발하여 이 땅을 짓밟는 적의 구분이 명확하다. 가족애 앞에는 이념도 사상도 쓸모 없지만 가족애가 사라진 곳에는 여전히 이념과 사상은 유효하다. 이런 면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반전영화라기 보다는 가족주의 영화라 보는 게 더 적합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6.25 전쟁의 한 복판의 시점에서 이 전쟁의 당위성이나 숭고함을 뒤로 밀어내고 전쟁의 아이러니를 전면에 내세우며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만큼은 당시로서는 무척 큰 의미가 있는 문제 제기였다 보여진다.
그로부터 1년 후에 개봉한 <웰컴 투 동막골>은 한걸음 더 전진했다. 여전히 시대적 배경은 6.25 전쟁 당시에다 남북의 군사가 서로 조우하는 상황이다. 처음엔 다소 긴장감이 흐르지만 영화는 참혹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남과 북의 군인이 서로 어우러져 함께 지내는 상황을 연출한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 싸울 이유가 있는가’라는 외침을 비로소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 또한 이러한 상황을 판타지와 같은 무대를 배경으로 하여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 전장의 현실에서 말하지는 못했다. 동화 같은 배경 속에서 소수의 병력이 어울릴 수는 있지만 전쟁의 현실이 동화 속에 침투 할 때 동화적 상황은 현실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포화속으로>는 볼 기회를 놓쳐 크게 언급할 내용은 없으나 평론의 글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다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반공영화의 틀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별다른 메시지 던지지 못한 그저 그런 전쟁물 아류작이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고지전>이 있다. 영화 <고지전>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한국 영화에서의 6.25 전쟁과 분단 상황을 다루는 일관적인 흐름에서 가장 앞서 있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고 있다. 6.25 전쟁의 한 복판, 그것도 가장 치열한 전투가 3년 동안 벌어졌던 그 치열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 싸울 이유가 없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60여 년 전의 6.25 전쟁 당시에는 이념의 문제도 있고 정의의 문제도 분명 전쟁의 주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60여 년 전의 그 전쟁을 다시 돌아보는 지금의 위치에서, 우리는 비로소 ‘왜 싸우는가’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을 쌓게 된 것이다.
<고지전>에서 그려지는 전쟁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도 아니고 조국의 공산화 통일을 위한 싸움도 아니다. 영화 속 그 누구도 이 싸움을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피 튀기는 싸움이 계속되지만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겨야 한다는 명분은 실종된 상태로 싸움이 계속된다. 수많은 군사들이 죽어가는 현장이지만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거나 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전쟁의 상태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모습과 점점 피폐해가는 인간으로서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전쟁이 시작되던 3년 전 싸우는 이유를 알고 있다 자신하던 북한군 장교조차 3년의 전투를 끝내는 휴전의 시기에 자신 또한 전쟁의 이유를 잊어버렸다 실토한다. 그리고 그렇게 허탈한 웃음을 뱉어내며 죽어간다.
<고지전>이 애록고지라는 장소를 택한 것 또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핵심에서조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전쟁의 명분 같은 것은 실종된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60여 년 전의 전쟁을 뒤돌아 보는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왜 싸워야 했는지, 전쟁의 명분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또 한 번 되새김질 하는 것이 아닌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이러한 성찰만이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잠재적 전쟁의 가능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것이다. 이념의 재무장 보다는 이제 ‘우리 싸우지 말자’라는 얼핏 보면 단순한 것 같은 다짐이 더 큰 전쟁 억지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 말하는 것 처럼 보인다.
<고지전> 이후,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다룰 영화에서는 과연 또 어떤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될까. 다시 반공으로 회귀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터이고, 아직 끄집어 내지 못한 좀 더 민감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 논리에 따른 프레임을 뛰어 넘어,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이야기 할 가능성도 없진 않아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여전히 민감한 내용도 꺼내놓고 고민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지금의 우리는 ‘싸울 이유가 없다’는 외침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 싸우지 않겠다'라는 다짐이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고지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쟁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 전쟁의 무의미함을 발견하게 해주고 있다.
영화적 재미도 물론 만족스러웠지만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의 울림이 컸던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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