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집권플랜

2010/12/28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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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열흘 남짓 다녀오는 일정에 맞추어 미리 주문해서 받아본 책 중의 하나였던 ‘진보집권플랜’. 인문학 계통에서 나오는 대담집들의 경우 통상적인 대화의 수준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이론서와 비슷한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비록 제목에 끌리고 대담자에 끌리면서도 단순한 coffee chat 이상의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수구 보수 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답답하기 그지 없는 현 상황에 대해 누군가 나 대신 좀 더 심도 있게 한탄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고, 왜 다시는 MB와 같은 세력이 집권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지, 진보 세력의 집권이 왜 필요한 지에 대해 나름의 정리된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진보가 집권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고 있으면서, 사실상 진보가 집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얄팍한 진보주의자인 나로서는(내가 정말 진보주의자인지, 중도에서 약간 좌측에 서 있을 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상 진보의 집권 플랜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당위성 그 이상의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던 것 같다. 수구 보수 세력이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것, 거기에다 더해 탐욕스럽다는 것만으로 이미 진보세력의 집권의 당위는 충분하다는 가정을 깔아놓고 있기에 진보집권은 당위요, 보수집권은 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진보세력의 집권은 내가 생각하듯 ‘당위성’ 그 자체로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DJ와 노무현이라는 나름의 진보세력의 집권을 가능케 했던 것이 시대의 당위였다면, 반대로 수구 MB 정권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도 어찌 보면 그 당시의 당위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당시의 상황이 만들어 놓은 당위성에 따라 국민들이 표를 던진 것이다. 그런 결과를 경험하고도 나는 여전히 진보세력의 집권은 당위라는 믿음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믿음만을 가지고 있다가 다음 대선에서 또 다시 수구 보수 정권이 집권하게 되는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그저 온당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탄만 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진보세력이 집권을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작업들에 대한 논의의 시발점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가치 있다고 생각 된다. 진보가 보수보다 상당 부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수호하고, 정의를 더욱 추구한다는 믿음과 함께 MB 정권이 지금 벌이고 있는 뻘짓까지 더한다면 다음 번 대선에서는 진보세력 집권의 가능성이 그래도 좀 높겠지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진보 세력의 집권을 위해서는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영역들에 대해 진보세력이 내세울 수 있는 뚜렷한 정책과 담론이 요구됨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제시를 통해 여전히 진보세력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는 국민들까지 설득할 수 있게 될 때 진보세력의 집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책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이후 진보세력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해당 정책들을 보다 더 치밀하게 적용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MB정권의 뻘짓에 황당해하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한들 그 자체로 차기 권력의 진보세력 집권이 자연스레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빼놓는 부분 없이 사회 전 영역에 대해 진보세력이 집권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2년 앞으로 다가온 다음 대선에서 진보세력이 다시 집권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 짊어 져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점들을 유의 깊게 관찰하며 과연 진보세력의 재집권이 당장 다음 대선에 가능한 일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 다음 5년 후의 일로 미뤄질 일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주요한 잣대를 제공해준다고 생각된다. 이에 더해, 진보세력의 재집권을 간절히 바라는 한 시민으로서 진보세력의 재집권뿐만 아니라 집권 후 성공적인 정책 집행을 위해 지금부터 논의가 필요한 담론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이를 진보세력 정치권에 주문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온라인 서점에서도 높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어 따로 추천하지 않아도 관심 있는 사람은 다 한번쯤은 읽어볼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진보세력의 집권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하다는 추천의 말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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