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한동대 총학이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 학내 설치에 관하여 내놓은 성명서와, 이 성명서의 일부를 지난 5월 31일 주일 설교에 인용한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일 터, 굳이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도 좋을 것 같다. 혹시 이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곳의 기사를 참조해도 될 것 같다. 해당 기사의 말미에는 사랑의교회 측에서 해당 기사에 대해 반론 형식으로 보내온 글도 같이 있으니 좋은 참고가 될 듯 하다. 그 외에도 각종 검색 사이트에서 이에 대한 소식은 쉽게 검색이 가능할 것이다.
한동대 총학의 성명서 관련하여서는 학교 내에서도 논란이 크게 일어난 상태고, 학생 평의회 및 일반 학생들이 총학의 사과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추후 결론을 지켜보면 될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성명서 사태만을 두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한동대 전체의 정체성에 대해 판단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다소 성급할 수도 있다. 이는 해당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 되는 가를 본 이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상황만 놓고 보면 몇몇 총학생회 간부들의 치기어린 신앙열정에서 비롯된 일인 것으로 판단되므로 지금에서는 이 몇몇 학생들만의 문제로 한정 지어놓는게, 다소 억지스럽지만 그래도 다소 안전한 방법인듯 싶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성명서 속의 논리를 일일이 집고 넘어가다가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간단하게 언급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당 사건에 대한 관심영역을 한정 지은 후, 나는 그 범위 안에서 몇가지 사항에 대해 언급을 하려 한다. 이미 며칠 지난 일이고, 한창 떠들석했던 일이므로 굳이 지금에 와서 세세하게 따지는 것이 필요할까 싶어 간단히 몇 개만 언급하려는 것이다. 몇가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글이 길어질 것 같다.
1. 기도
3일동안 금식했단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며 애통해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 뜻을 구했다고 한다. 죽은 자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의 향을 올려야 할 때라고 한다.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옵소서란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또한 이 성명서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이러한 시기에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라는 젊은이들의 다짐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라는 저들의 호소에 일차적으로 나는 동의한다. 기도는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쉬지말고 해야 하는 것이라 성경에 되어있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구해야 할 것이 있을 때에 특별히 더 마음을 모아 기도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성경에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대부분 특별히 기도에 힘썼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기도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그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 여길 수 있으므로 나는 저들이 현 시국상황의 심각성을 진심으로 통감하고 있다는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진정성에서만큼은 나보다 100배 낫다고 말할 수도 있을것이다. 나는 현 시국상황을 놓고 기도하기 전에 한참이나 멍하니 아무일도 하지 못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슬픈 마음을 추수리고 난 한참 후에야 비로소 나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기도가 중요하다’는 저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도 없다. 특히 이러한 주장이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 기도외의 다른 노력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대응논리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기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의 다양성이다. 어떤 때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무릎꿇고 기도만 해야 하는 때도 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을 멈추고 기도해야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기도하면서 쟁기질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때도 분명 있다. 해야 할 일들, 필요한 일들을 땀흘려가며 해가면서 기도를 병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도의 다양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오직 기도만이’라 말하는 것은, 기도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현 상황에 대해서도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함을 보여줄 뿐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은, 결코 다른이의 행동을 폄하하거나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남이 하는 행동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비아냥거리기 위한 말이 아니다. 정말 저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기도가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다면 분향소 설치를 반대한다 말하고, 성명서를 내어 본인의 주장을 말하는 것 조차 하지 말았어야 한다. 자신들의 하고픈 말은 다 하고, 남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판단대로 다 하고 난 다음에 외치는 ‘다른 무엇보다 오직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위선적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본인 자신들도 기도보다 분향소 설치를 반대하는 것이 더 중해 보이고, 성명서 내어 본인의 생각 주장하는 것이 더 급해보이는데 왜 멀쩡히 자기일 하고 있는 자들에게 ‘기도만 해라’는 식의 언어 폭력을 사용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 가장 신성하고 고귀한 행동이라 말하는 ‘기도’를 수단화 하여, 도리어 상대의 행동을 폄하하고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2. 회개
성명서에도 잘 나와있듯이 지금 우리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회개가 아닌 국가, 민족 차원에서의 회개일 것이다. 국가, 민족 차원의 회개라는 것은 곧 한 나라의 공의와 정의가 무너졌음에 대한 회개일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것, 내가 직접 행한 일이 아니니 대충 얼버무려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해주소서’라는 식의 어정쩡한 회개는 이미 하나님께서도 다 아시고 무시하신다. 구약 성경을 보면 기도의 장면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그 중 정말 많은 비율의 기도가 하나님께 전혀 상납되지 않는 기도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하는 이의 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수 일동안 금식을 하고, 살진 소와 양을 수백, 수천마리 갖다 바치고, 온갖 거룩한 의식에 맞춰 올리는 기도도 reject 되기 일쑤다. 먼저 공의를 세우고 정의를 세우라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아 그런 일이 없는지 먼저 돌아보고 이를 바로 세운 다음에야 비로소 기도를,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저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말 궁금하다. 국가적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곧, 이나라의 공의와 정의가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회개한다는 것은 무너져 내린 공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무엇보다도 구체적이어야할 이 회개, 이 회개를 늘 부르짖는 저들이 과연 무엇을 회개한다는 것인지, 이제 회개하니 앞으로 어떠한 식으로 공의와 정의를 세워나가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들은바가 없다. 하나님께 reject 당할 아주 전형적인 회개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졌음은 아는데, 회개의 구체적인 내용도 없고, 회개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도 없다. 말은 회개한다고 하지만, 혹여 십자가 위의 예수님 기도처럼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식의 숭고한 희생자의 마음을 가지고 회개의 당사자를 타자화 하며 드리는 기도, 정작 자신은 회개의 범주에서 제외시켜 놓는 기도는 아닌지 솔직히 궁금하다.
이런면에서 볼 때, 저들이 왜 이럴 때마다 ‘화해와 통합, 용서’등을 가장 앞에 내세우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음과 동시에 이런 저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무너진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화해와 통합, 용서 이전에 옳고 그름을 철저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따져봐야 무너진게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엇이 무너진 것인지 알아야 이를 다시 세우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듯 보인다.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상황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랑과 신뢰 같은 말로 믿고 따르라는 식의 말을 늘어 놓을 뿐, 이러이러한 것이 불의라 따지는 말에 대해서는 비 성경적이라, 심지어는 분열의 영이라 폄하하기까지 한다.
“공중파 방송에서 무당과 귀신 부름이 드라마로 오락으로 정당화 되었고, 성적 타락과 높은 이혼율, 저출산과 가족의 해체, 자살률의 급증과 우울증의 확산”이 바람직한 현상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언급된 것들은 기독교 신앙 관점에서의 문제, 도덕성의 문제에 가깝다. 국가적 회개는 이보다는 정의와 공의의 문제에 더 치중되어야 마땅하다. 성경은 정의와 공의 문제를 언급할 때, 이를 억압 받는 사람이 도움을 받고 있는지, 약한자의 억울함이 풀어지고 있는지를 따진 후에 우상숭배와 같은 개인 신앙의 문제를 따지고, 그 이후 도덕성의 문제를 따진다.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꺼려하는 회개의 목소리에 진정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나는 의심스럽다. 게다가 종교국가 체제가 아닌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정의와 공의를 말하려는데 기독교 신앙 관점의 신앙관, 도덕관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지 또한 이해할 수 없다.
3. 마무리
며칠간 머리속을 맴돌던 생각을 적어보았다. 사실 좀더 생각이 필요한 문제들이다. 더 생각하다보면 좀 더 다듬어진 생각이 나올 것 같다. 마지막으로 바른교회 아카데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하여 발표한 ‘목회적 권고문’을 아래에 덧붙인다. 한동대 총학생회의 성명서, 오정현 목사의 설교와 좋은 비교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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