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운은 어느 면으로 보나 loser다. 옛 여자친구에게 350만원을 빌려놓고 종적을 감춘 지 1년이 넘었다. 그 사이 결혼도 했다가 이혼도 했고, 하던 사업도 망해서 전세금도 날려먹었다. 한동안 지인의 집에 얹혀 살다가 지금은 거처도 없이 떠도는 신세다. 빌려준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 옛 여자친구인 희수가 병운을 찾아낸 곳도 경마장이었다. 그곳에서 병운은 몇번 말에 배팅을 해야 하는지 이리저리 훈수와 참견을 하고 있다. 경마장에 지금 당장이라도 가보면 으레 있을 법한 그런 사람이다, 이리저리 참견하고 훈수를 두지만 정작 자신은 배팅할 돈도 없는 그런 사람 병운.
빌려준 35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어렵게 병운을 찾아낸 희수를 앞에두고 너스레를 떠는 병운의 모습에서 나는 영화 전체의 감정선이 이 친구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로 흘러갈 것이라 확신했다. 이 사람 저사람 만나 급전을 구하며 온갖 비굴한 자세를 취하는 병운. 고개를 숙이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도 성치 않을 녀석이 희수의 온갖 것에 대해 참견하느라 정신이 없다. 급전을 빌리러 찾아간 중년의 여자 사장님에게 희수의 차에 놓여있던 초코렛통을 태연스레 선물인양 건네는 모습을 보며 뭐 세상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 형편없고 대책없는 루저 병운이 하는 행동이 자꾸 내 예상선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녀석이라면 1년전에 빌린 350만원, 그것도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돈, 대충 말로 때우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당장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는데 급급해야 제격이라 생각했다. 병운의 현재의 삶이 보증하고도 남을 그의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 그렇게 아쉬운 소리를 이사람 저사람에게 하면서 희수의 돈을 정말 갚아 나간다. 몇번의 장면에서 ‘저녀석 저기서 분명 사라질 거야. 도망갈거야’ 라고 예상하는 내 확신에 찬 예상을 부끄럽게 만들며 꾸역꾸역 돈을 구해서 희수 앞에 나타난다. 병운의 구차한 돈 구하기 행위를 보다못한 희수가 도리어 빌린돈 돌려받기를 중단하려는 찰나에도 녀석이 나서서 350만원을 모두 갚아야 한다고 종용까지 한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감정의 색채는 어느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독특한, 아니 유일무이한 색감이다. 루저의 삶을 보여주는 비슷한 영화들이 허무와 씁쓸한 감정을 가득 실어준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가 싶을 정도로 희석해서 전달해준다. 병운과 같은식으로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채무자에게 갖는 분노나 조롱의 감정도 영화가 초반을 넘어가면서 자연스레 희석되어 녀석의 농담과 애교에 매료되어 버린다.
이런 감정을 뽑아낼 수 있는 감독의 능력이 대단하다 싶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때 낀 얼굴에서 한없는 인생의 허무함과 슬픔을 느끼다가도, 치아마저 다 빠져버린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인생의 참 의미와 행복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찌 되었든 그 노인이 살아온 삶의 깊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이러한 다양한 인생의 감정을 옛 여자 친구의 돈 350만원을 갚지 않고 종적해버린 병운, 거처할 곳도 없이 이리 저리 떠도는 병운, 이사람 저사람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온갖 굴욕을 서슴지 않는 병운, 인생이 갖는 다양한 감정을 뽑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만 같은 병운의 삶에서 끌어낼 뿐만 아니라 이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까지 보여주고 있다.
참 재미없을 것 같은 영화 제목에, 재미 없을 것 같은 포스터에, 그냥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잊혀져버릴 뻔한 영화를 놓치지 않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 감독의 예전 영화, <여자, 정혜>, <아주 특별한 손님>도 시간 내서 꼭 한번 볼 터이다.
p.s.
영화에는 위와 같은 두 남녀의 다정한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2시간의 영화를 통틀어 전도연이 약간 미소를 짓는 장면도 두어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영화를 찍으며 쉬는 시간에 찍은 사진인 듯 싶은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한다면..... 몇년 후 영화속의 두 남녀가 이런 관계로 발전했을거라 그 결말을 예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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