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가 지니고 있는 '예의'라는 개념과, 내가 알고 있는 '예의'라는 개념과의 교집합의 부분은 지극히 작다. 보다 쉽게 그리고 요즘 자주 쓰이는 말로 표현하면 내가 볼 때 그 친구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던지 아니면 출근전 아침식사로 개념을 물말아 먹은 것임에 분명하다는 말이다.
업무상으로 만나는 관계에서 괜한 감정 싸움을 할 수는 없는 터, 게다가 근무 장소도 다르니 마주칠 일도 사실 거의 없다.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겨왔다. 나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직급상 위인 우리 팀장님한테도 똑같이 하는데 별 수 없었다.
이메일 한통과 전화 한통.
자기가 잘 모르고 있는 내용에 대해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분명 담겨있는 contents는 '부탁'인데 보내기는 우리 팀의 팀장님도, 그룹장님도 거의 안쓰는 '명령'이라는 포장지로 곱게 싸서 보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업무상 관계에서 괜한 감정을 드러내는건 제무덤파기일 뿐이다. 별 수 있나. 깔끔하게 mirroring을 해서 보냈다. 보내준 포장지 흠집 안나게 잘 풀어낸 다음에 보내온 '질문' 조심스럽게 꺼낸 후, 내가 보내는 '답변'을 담아 다시 원래대로 잘 포장해서 보내줬다. Technically perfect한 mirroring이다.
약간의 성의를 더해 답변이라도 자세하게 쓸까 생각했지만, 그러다간 보내준 포장지로 포장하기엔 턱 없이 커질 것 같아서 딱 포장해서 보내준 부피만큼 답변해서 보내줬다. '명령'으로 포장한 한줄짜리 질문을 받고, 몇십줄 짜리 답변을 담고, 포장지도 예쁜걸로 다시 싸서 보내서 받은거라고는 한줄짜리 '수고했다'는 답변 하나 달랑 받았던 예전 기억도 결정에 한 몫을 한다.
전화가 왔다. 바쁘냐고. 아니라고 했다. 혹시 기분 안좋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그리곤 통화 종료.
본인이 보낸 포장지 다시 재활용해 보내주니 뭔가 느꼈나보다. 뭐냐. 그럼 그동안 그 포장지가 상당히 기분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써왔다는거 아냐.
그리곤 다시 날라온 contents는 비어있지만 나름의 '예의'라는 포장지를 사용한 메일. 이번에도 다시 포장지 재생해서 보내줬다. 대답 못해줄 정도로 바쁜일 없으니 궁금한 것 있으면 말하라고, 아는 한에서 답변 해주겠다고.
아함..이제 좀 그 친구와 내가 알고 있는 '예의'라는 교집합의 부분이 좀 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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