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는 건 적어도 종교성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이야기일 터이고, 종교성이 강한 사람에게 사실 가장 편한건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말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따르는 것일 터이다.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며 성경속의 문자들이 지금의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를 해석해내는 수고를 굳이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종교 지도자들이 알아서 해석해서 풀어주는 것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현재에 가장 옳은 해석이라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일 터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 자체가 사실 '복종'이라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을 보아도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억압할 '왕'이라는 권위자를 세울 것을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할 적당한 권위자를 찾게 되면 그 이후 자신 스스로의 사고는 잠시 중지한 채 권위자의 생각과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데에서 행복을 느끼곤 한다. 복종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느낌은 일견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인간을 가장 편안한 행복의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상황을 가정할 때,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가 실은 진리가 아닌 거짓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인정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자신이 진리라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상태에서 동시에 소위 그 종교의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불편한 일이다. 말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인 것 같지만 이와 같은 상호모순의 상황 즉,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리가 진리임이 확실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종교가 속한 집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지도자의 가르침과 해석을 부정하는 상황은 크던 작던지 간에 일종의 불안감을 조성해 주는 역할을 한다.

위의 <지식채널e>의 '버튼을 누르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며 든 생각이다. 종교지도자가 해당종교의 교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심지어는 해당 종교의 교리와 180도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불편한 감정이 시간을 더할수록 줄어들게 되는 이유는 결국 종교지도자들에게 투영한 보이지 않는 권위라는 것의 작용때문인듯 싶다. 소위 영적인 위계질서라는 틀 안에서 기존에 맺어진 종교인과 종교지도자라는 관계가 종교외적인 곳에서의 종교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가르침에 대해 반항할 힘마저 소멸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하에서는 일단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 종교지도자의 판단을 교리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본인의 심리적 안정에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이 경우에 종교지도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항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본인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실 위의 동영상에 나온 실험자들이 불합리한 명령에 반항하지 않고 순응한 것은 내려진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려진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자의 권위에 굴복하고, 모든 책임을 명령을 내린 권위자에게 돌리는 행위를 통해 해당 명령을 수행하는 본인의 불편함을 해소했을 뿐이다.

위의 동영상에 나온 말이다.

피실험자들이 실험자가 내리는 명령에 반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수많은 해결책이 있겠지만 다소 간단하게 해결책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될 듯 싶다. 첫째, 종교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발언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여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행복한 상태를 유지한다. 두번째, 종교지도자의 잘못된 권위를 업고 나오는 불합리한 발언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불편해한다. 그리고 세번째, 위의 동영상에 나온 것과 같이 권위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반항하여 또다른 행복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그동안은 두번째 방법과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나름의 해결책을 삼아왔다. 그러한 불편함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는 그러한 불편함을 잠시동안 이겨내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그 불편함이 상시적인 것이 된 요즘에 있어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견뎌내는 데에는 사실상의 한계가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러한 상시적인 불편함을 견뎌내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은 아니다. 더 힘든 것은 그러한 불편함을 견뎌내는 와중에는 영적으로 채워지는 모든 것들이 잠시 중단되거나 오히려 기존에 채워진 것들까지 감퇴되는데에서 오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름의 의미있는 종교생활을 위해서는 권위에 완전 복종을 하며 행복을 추구하던지, 권위와의 완전 단절을 통해 새로운 행복을 찾던지의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작금의 상황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권위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행복의 가능성을 찾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제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새로운 행복을 찾아가는 것을 게을리하며 관계 단절의 그 자리에 그냥 멍하니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는 일일 터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개인적으로 성경말씀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하나님과 단둘이 대화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 것 또한 필요하다. 단절을 하고 난 후 새로운 행복을 찾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기존의 권위에 완전 복종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말씀을 깊이 읽고,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것, 그것이 바로 내가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시에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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