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 '모방범'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되어 3권으로 출간되었다는, 반은 기사요 반은 광고인 글을 통해서였다. 한권으로 출간해도 될만한 책을 어떻게든 권수를 늘려보려고 3권으로 출간한 것이 아닌, 각 권이 500페이지를 훌쩍넘어가는 책이라고 소개가 되어있었다. 추리소설 시장이 그다지 넓지 않은 국내시장에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그의 책이 번역되어 출간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며 글쓴이는 스스로 그 사실에 도취되어 뿌듯해하고 있었다. 책을 다독하던 시절이었다면 그 글 하나만으로도 바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을 터였다.
그 이후 일년여가 지난 며칠전 아내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라는 책을 뚫어지게 보더니 순식간에 다 읽어버리는 것이었다. 400여페이지를 훌쩍 넘어가는 분량을 술술 읽어나가는 아내의 모습에 뭔가 필이 왔고, 글쓴이가 다름아닌 '모방범'을 쓴 미야베 미유키라는 말에 아내가 다 읽자마자 손에 잡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만 하루만에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그렇게 몰입도가 강한것도 아니고, 소설의 내용이 서스펜스로 가득찬다던지 반전으로 가득차 있다던지, 아니면 상상을 뛰어넘는 추리로 가득찬 것도 아니었는데 손에서 쉽사리 놓아지지 않는 책이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달고 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개콘의 한 코너 '같기도' 식으로 표현하면 '이건 추리소설도 아니고 연애 소설도 아니여'쯤 될 듯 싶다. 한 여자를 살해하고 그 여자의 삶을 이어받아 살해된 여자 행세를 하며 살아가던 여자가 있다. 그리고 사건의 전모를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파헤쳐 나가는 휴직중인 형사가 있으니 분명 추리소설이다. 읽다보면 두어번 정도 '우와~!'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사건의 진실이 예상치 못하게 밝혀지는 짜릿한 장면도 있다.
하지만 추리소설이라는 뼈대를 이루는 살들의 내러티브는 의도적일만큼 차분하게 진행된다. 다리를 다쳐 활동량에 큰 제약이 있는 휴직중인 형사의 모습처럼, 범인을 잡기위한 다이내믹한 극의 진행은 없다. 형사가 파헤쳐가는 진실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 소설의 중반 이후에서야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극악한 범인의 행각이 밝혀질수록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범인을 하루바삐 잡길 바라며 초조하게 만드는 장면은 기대할 수 없다. 추적중인 사건과 상관없는, 아파트에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을 아이들이 슬퍼하며 추모하는 장면이 곳곳에 삽입되어도 방해되지 않을만큼 이야기는 여유를 갖고 진행된다. 사실 소설의 흐름은 살해당한 피해자의 밝혀지는 과거들, 또한 살해범으로 추정되는 자의 과거들이 밝혀지는 과정은 살해범을 뒤쫒는 다급함보다는 그들의 과거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피해자와 살해범 모두에 대한 공통의 안타까움과 측은함의 감정을 요구한다. 현대사회의 소외와 외로움을 주제로 소설을 썼어도 좋을만한, 살인이라는 범행을 빼버리고 남은 것만 간추려도 그 자체로 꽤 괜찮은 소설이 됐을만한 내용들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안에 하나로 버무려져 있다.
자극적인 맛이 하나도 없이 담백하기만한데도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배가 부르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고 먹게 되는 음식처럼,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그런 차분한 내러티브를 유지하면서도 읽는이가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담고 있다. 어릴적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친구를 살해한 범인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극악한 살인범을 잡고 내동댕이 친다거나 철창신세를 지게 만들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기보다는 단지 그 범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다고 한 남자의 말처럼, 이 소설은 범인의 범행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범인의 마음을 먼저 열고 들어가 들여다 보고픈 마음이 들게 한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일본 작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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